언론보도
언론에 보도된 한국해비타트의 소식을 소개합니다.[미주한국일보]빈민위한 사랑의 집짓기 ‘망치의 신학
- 작성일2009/02/1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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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은 앨라배마 주 작은 시골마을에 살던 6세 때였다. 아버지에게서 돼지 한 마리를 받은 그는 통통하게 잘 키워 11달러에 팔았다. 재미를 본 꼬마는 돼지 키워 팔기를 계속하다가 토끼와 닭으로 품목을 넓혀갔고 미끼용 지렁이와 잔고기들을 잡아 낚시꾼들에게도 팔았다. 10세 때 아버지가 400에이커 농토를 구입하자 그는 작은 가축들을 처분하고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돈벌이에 몰두했던 중에서도 어린 시절 기억 속엔 한 장면이 선명하게 남았다. 농토 한 구석 노부부가 살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자신의 아버지가 수리해주던 모습이었다. 그 오두막이 말끔하고 탄탄하게 고쳐졌을 때 기뻐하던 노부부의 즐거움은 어린 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해비타트’창설자 밀러드 풀러 타계
전세계 빈민층을 대상으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구호단체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International)의 창설자 밀러드 풀러가 지난 3일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6년 창설된 해비타트는 지난 30여년간 100여개 국가의 150만여명 가난한 사람들에게 30만채 이상의 집을 지어주는 자선활동을 펼쳐왔다. 사랑의 집짓기는 전적으로 자원봉사자들의 노동과 기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풀러는 이 자원봉사 정신을 ‘망치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풀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하나님의 컨트랙터’라고도 불렸고 해비타트의 기본정신도 기독교적 가치 실현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그의 삶의 중심은 신앙이 아니었다.
오번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뒤 앨라배마대학 로스쿨에 들어간 그는 거기에서 마음이 딱 맞는 친구 모리스 디즈를 만났다. 재학중 돈벌이에 합의한 둘은 공동의 목표를 세웠다 : ‘부자가 되자’
그들은 다양한 비즈니스를 벌렸다. 직접우편 판매, 학생주소록, 학생들의 생일케익 배달 서비스, 헌집 싸게 사서 수리해 팔기 등등으로 법대 재학중 그들의 연수입은 1만5,000달러에 달했다. 둘은 변호사도 공동으로 개업했다. 변호사 개업 중에도 지역에서 생산된 트랙터 쿠션을 농부협회에 팔아 7만5,000달러를 버는 등 사업은 계속했다. 가장 성공적 사업은 요리책 출판이었는데 출판사업 2년만에 변호사 생활을 접은 그들은 미국 최대 요리책 출판업자로 올라섰다. 29세에 풀러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은 헤어졌다. 친구 디즈는 빈민돕기 법률단체 설립에 동참하기 위해 떠나갔다. 풀러의 삶도 완전히 변했다. 그가 법대 재학 중 결혼한 아내 린다가 이혼을 요구한 것. 2007년 출판된 그들 부부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돈벌이에 정신없는 남편과의 삶에 환멸을 느낀 린다는 외도까지 하는 등 가정은 파경 직전이었다.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긴 대화가 이어졌고 부부는 기독교 가치관에 따르는 새로운 생활을 노력해보기로 합의했다. 첫 단계는 물질적 사치와의 결별이었다. 스피드 보트, 호수가의 별장, 고급승용차 등을 선두로 전 재산을 처분한 풀러는 가족을 데리고 조지아 주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인 코이노이아 농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지도자이며 성경학자인 클레어런스 조던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계획한 풀러부부가 처음 시작한 것은 근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해비타트 운동이 태동한 것은 여기서였다. 1973년 아프리카 자이르(현재 콩고)로 날아가 114채의 집을 지어주는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한 풀러는 1976년 ‘거주지’ ‘보금자리’라는 뜻의 ‘해비타트’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집짓기 단체를 창설했다.
자원봉사로 집을 지어주고 집값은 무이자로 할부상환 하는 것을 기본 방식으로 정했다. 기부 받은 돈과 자재를 사용해 자원봉사자들의 노동력으로 집을 지어 한푼의 이익도 남기지 않고 저소득층에게 실비만 받고 집을 파는데 구입자(집짓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이자 없이 집값을 조금씩 갚아가면 된다. 풀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이 ‘예수의 경제학’이라고 후에도 늘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자는 그의 취지는 전 세계에서 열띤 호응을 불렀다. 지미 카터 전대통령 등 유명인사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함께 망치를 들었고 풀러는 1996년 미국에서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풀러는 2005년 부하 여직원으로부터 성추행 고발을 당하면서 해비타트에서 물러났다. 그는 혐의를 강력 부인했지만 15년 전에도 5명의 여직원들이 비슷한 주장을 했었으며 해비타트의 새로운 세대들과 의견도 잘 맞지 않았다. 이사회의 공식조사는 무혐의로 결론지어졌지만 풀러부부는 해비타트를 떠났다. 그러나 풀러부부는 다시 ‘풀러 집짓기 센터’라는 새 단체를 설립하여 집짓기 운동을 계속, 미국 내 24개주와 해외 14개국으로 봉사영역을 넓혀왔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이재민들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 루이지애나로 달려갔던 풀러는 어린 두딸과 그들의 엄마를 위한 집을 지어준 후 “이 어린 소녀들이 자라서 무엇이 될 지 우리는 지금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지요 : 살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마련되었으니 그들의 생은 보다 나은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뉴욕타임스·LA타임스-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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