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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해비타트가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

    언론보도

    언론에 보도된 한국해비타트의 소식을 소개합니다.
    [조선일보]풀러와 해비타트
    • 작성일2009/02/06 11:40
    • 조회 1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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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미국 앨라배마대 로스쿨 학생 밀러드 풀러가 친구와 함께 유통회사를 차렸다. 요리책과 캔디 따위를 파는 것이었지만 당시로선 생각할 수 없던 우편 판매 방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풀러는 변호사가 된 뒤에도 사업을 놓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던 그에겐 오로지 부자가 되는 게 목표였다. 29세 되던 해 그는 백만장자가 돼 있었다. ▶풀러는 돈 모으는 재미에 빠져 휴일도 잊었다. 그럴수록 아내와 멀어졌고 한창 재롱 부리는 아이들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결혼 5년여 만에 아내는 "돈만 추구하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며 별거를 요구했다. 그는 그때야 미친 듯 집착했던 몇 년을 되돌아봤다. 1965년 그는 살 집만 남기고 전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풀러는 애틀랜타 인근 기독교공동체 코이노니아 농장을 찾았다. 거기서 땅은 있어도 돈이 없어 집을 짓지 못하는 농장 사람들을 보고서 '협동주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모두가 돈을 갹출하고 품앗이를 해 집을 지으면 집을 얻은 사람이 비용을 무이자로 장기간 조금씩 갚는 방식이다. 1972년 농장 안에 뜻을 함께하는 27가구 마을이 생겼다. '거주지' '보금자리'라는 뜻의 해비타트(Habitat) 운동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풀러 부부는 아프리카 자이르,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건너가 이 아이디어를 시험했다. 주민들은 쇠똥으로 지은 집에서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부는 건축비를 갚아나갈 능력이 있는 주민을 골라 시멘트 블록 집짓기 운동을 벌여 성공을 거뒀다. 부부는 1975년 귀국해 국제 해비타트 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그 깃발 아래 세계 어딘가에서 24분마다 한 채씩 집이 서고 있다. 95개국이 참여해 지금까지 지은 집이 30만채를 넘는다. ▶해비타트는 1992년 한국에 상륙했다. 2001년엔 이 운동의 열성 멤버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여섯 곳에서 동시에 무주택자를 위한 집을 짓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전국에 15개 지회가 결성돼 작년에만 1151채의 집을 짓거나 고쳐줬다. 그간 비용과 일손을 보태준 자원봉사자가 16만명에 이른다. 해비타트 창시자 풀러가 엊그제 74세로 숨졌다. 그는 현대적 박애(博愛)의 한 상징으로 남았다. 부(富)에 대한 집착을 벗지 못했다면 도저히 얻지 못했을 이름이다. 기사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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