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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해비타트가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

    언론보도

    언론에 보도된 한국해비타트의 소식을 소개합니다.
    [조선일보]목사님 거기서 뭐하세요?
    • 작성일2006/11/02 14:29
    • 조회 1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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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이웃들 머물 집 짓고 있지요 우리 마을에 사랑을 세우고 있지요” 太白서 10년째 ‘해비타트 운동’ 이끄는 최준만 ‘목수 목사님’ 지난달 30일 오후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의 산기슭. 마을 가운데 만추(晩秋)의 햇살을 가득 머금은 흰색 2층집들이 나란하다. 뒷줄 다섯 채는 벌써 입주했고, 앞줄 세 채는 마무리 공사 중이다. 언뜻 분위기 좋은 펜션이나 빌라로 보이는 이곳은 ‘태백사랑의집짓기운동’이 무주택 서민을 위해 지어준 ‘사랑의 집’들이다.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손때가 묻은 집을 어루만지던 태백해비타트 이사회 회장 최준만 목사(54·태백연동교회)는 “껍데기 집이 아니라 집 이상의 집, 제대로 된 가정을 세워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태백사랑의집짓기운동은 지난 97년부터 지금까지 10년간 무주택 서민 42가구에 집을 지어줬다. 현재 12가구가 입주를 앞두고 있으며, 8가구는 골조공사를 마친 상태다. 최 목사는 전국 후원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정성을 엮어 서민들에게 ‘내 집’을 선물하면서 탄광도시 태백에 ‘작은 기적’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최 목사는 고교 때까지도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목회자는 꿈도 꾸지 않았다. 부친은 태백에서 석탄 캐는 광원이었고, 똑똑한 장남이 태백을 벗어나 대처에서 출세하기만을 바랐다. 최 목사는 연세대 경제학과에 진학하고 은행원으로 취직하면서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배운 신학은 기어이 그를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제대한 아들이 “목사가 되겠습니다”고 선언했을 때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부친이 “장로도 괜찮다던데…”라고 중얼거렸던 때를 최 목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첫 목회지로 태백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2년 반을 지냈고, 전주 기전여고 교목생활을 거쳐 미국 유학(컬럼비아신학대)도 다녀왔다. 1990년 귀국한 후 그는 결국 태백으로 다시 돌아왔다. “낮은 곳을 찾았지요. 미국도 서울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제가 잘 알고 제 손길이 필요한 곳이 태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96년까지 7년 동안 교회 목회 대신 태백광산지역복지선교회 총무를 맡아 양로원, 사랑의도시락, 진폐환자재활시설, 어린이도서관 등의 복지사업을 펼쳤다. 1996년 후반부터 교회개척을 시작한 그에게 새로 주어진 도전이 해비타트였다. 자신의 가정집은 교회로도 쓰였고 자원봉사자숙소로도 내놓았다. 예배를 인도하는 한편 공사장에서 함께 못질하길 10년이 흘렀다. 그는 교회 목회와 해비타트운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고 있다. “입주자 가족은 건축과정에 500시간 이상 동참해야 하고, 자신의 처지에 맞게 집값을 계약하고 상환금액도 정해서 꼬박꼬박 갚습니다. 또 입주 후에도 정기적으로 재무·법무상담부터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각종 교육을 받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희망과 능력을 드립니다.” 각계의 지원을 호소하고 다니면서 사찰 신도회장과도 친해졌다. 그는 지금도 처음 목회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맥이 풀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께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하는 마음으로 태백에 헌신한다는 각오다. “우리가 집 지어드린다고 주택난 자체야 얼마나 해소되겠습니까. 집 짓는 과정을 통해 지역이 하나가 되고 계층을 뛰어넘어 공동의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요.” 태백=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뉴스원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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