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언론에 보도된 한국해비타트의 소식을 소개합니다.[오마이뉴스] 국회 가고 싶던 청년, 지금은 동네 사진사
- 작성일2015/08/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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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4.
국회 가고 싶던 청년, 지금은 동네 사진사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30] 사진 찍는 청년 스물일곱 살 김상연
▲ 사진 찍는 청년 김상연씨
상연이 최초로 갑작스런 죽음과 마주한 곳은 군대였다. 우리나라 성인남자의 평균 수명 약 80세, 상연은 자신에게 남은 생이 60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 속에 품은 이상을 다음으로 미루고 살 여유가 없다고 느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오늘부터 해야 한다고.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상연이 어릴 때 부모님은 주말부부였다. 아버지는 군산 대우자동차에 다녔다. 어머니는 광주에서 상연과 나영 남매를 기르면서 24시간 국밥집에서 일을 했다. 남매가 학교 갈 시간에 퇴근한 어머니는 주무셨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어머니는 이미 일터에 나가고 없었다. 누나한테 많이 의지하고 자란 상연은 늘 생각했다.
"이 다음에 결혼하면, 나는 진짜 화목한 가정을 만들 거야."
상연이 제대하고 와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출근하는 어머니 안아드리기. 대화도 별로 안 하고, 스킨십은 아예 없이 살던 식구들은 경악했다. 어머니는 "징그럽게 왜 이래!" 하며 의사표시를 분명하게 했다. 상연은 끄떡하지 않았다. 2주쯤 지나니까 어머니는 출근할 때 현관 앞에서 상연을 기다렸다. 결국, 식구끼리 안아주기는 가풍이 되었다.
▲ 상연씨의 어릴 때 꿈은 화목한 가정. 군대 다녀와서 상연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출근하는 어머니 안아드리기.
지금은 식구 모두가 서로 스킨십을 잘 하고 대화도 많이 한다. ⓒ 김상연
군산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자동차공학부 2학년으로 복학한 상연. 가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아동가족학과의 부모 교육 강의를 들었다. 내 감정을 드러내서 얘기하는 나 전달법을 배웠다. 그때까지 상연네 식구들이 주고받은 짧은 대화는 너 전달법이었다. 행동이 없는 배움은 허상, 상연은 어머니한테 나 전달법으로 얘기하자고 했다.
"어머니가 나 전달법을 알고 나서는 점점 달라지셨어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셨어요. 그 전에 저는 어머니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 다 알지 못했어요. 강한 분이라서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을 안 하셨는데 그런 얘기도 다 하셨어요. 덕분에 저는 3학년 때부터 부전공으로 아동가족학을 공부했어요."
복학생 상연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도시락을 직접 싸가지고 다녔다. 하루 일과는 운동과 공부뿐. 다행히도 전공 공부는 적성에 맞아서 재밌었다. 성적도 1등. 그러나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독거노인들 집 고쳐주는 일이었다. 오래된 집에 찾아가 단열재를 붙였다. 방 안을 새로 도배하고 장판을 깔았다. 냉장고 정리도 해 주었다.
배를 타고 군산 개야도에 들어가서 집을 고친 적도 있다. 사람들은 정말 얇은 벽으로 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아이들과 놀이를 하는데 여자아이가 계속 쓰러졌다. 영양실조로 달팽이관이 손실 되어서 그렇단다. 상연은 서울까지 가서 집을 고친 적도 많다. 한국 해비타트와 서부발전이 같이 하는 집 고치기 사업에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보태기 때문이었
▲ 상연씨는 대학 다닐 때 독거노인들이 사는 낡은 집을 고쳐주러 다녔다. 도배하고, 장판 깔고, 냉장고 정리를 했다. ⓒ 김상연
"집 고치는 팀들이 참여하는 UCC 사진 대회가 있었어요. 수도권 학생들도 많죠. 다른 팀들은 1년 동안 집 고치는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었어요. 저희 팀은 여름에 고쳐준 집을 겨울에 다시 찾아가서 후속 인터뷰 영상을 만들었어요. 군산경찰서 뒤쪽에 있는 집이었는데 할머니하고 지적장애 아들하고만 살았어요. 콘셉트가 달라서인지, 저희 팀이 1등을 했고요."
사실 상연에게는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 남들이 "여친이야?"라고 묻는 친누나 나영씨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누나는 웹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면서 주말에는 사진 찍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영씨가 카메라를 업그레이드하자 남은 보급 기종 카메라는 군에서 제대한 상연의 눈에 들어왔다. 복학생 상연은 꽃과 풍경 사진을 하루에 100장씩 찍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들을 찍었다.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쓰레기봉투도 찍었다. 카메라 렌즈로 보는 세상 만물은 제각각 의미가 있었다. 상연은 대학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 사진을 찍었다. 상대에 대한 애정을 품을수록 인물 사진은 잘 나왔다. 사람들이 사진 좋다고 반응을 해 줄 때마다 그는 재미있었다. 보람을 느꼈다.
▲ 상연씨는 해외봉사 팀을 기록하기 위해서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갔다. 단기간에 끝나는 봉사보다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 김상연
대학 4학년 때, 상연은 해외봉사 가는 학생들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사 자격으로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갔다. 교육봉사, 한국 학생들은 준비를 많이 해간다. 가져간 교육 내용을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다. 성과를 내는 사진은 반드시 찍어야 한다. 한국 대표가 현지 학교의 교장 선생님에게 돈 전달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때 상연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진을 찍잖아요. 거기 아이들은 말도 안 통하는데 1년간 정규수업을 해외봉사 대학생들한테 내준 거예요. 2주마다 대학생들은 계속 바뀌고요. 봉사단원들은 마치고 나갈 때 야! 오늘 끝났다. 뭐뭐 하고 놀자고 말해요. 그러니까 현지 아이들이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좀 허무해요. 이별하는 게 익숙해서 우는 아이도 없고요.
단기간에, 그 나라에 없는 교육을 하고 오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1,2년 동안 유지가 된다면 몰라도요. 차라리 그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어주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장기적으로 머무르면서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진짜 대화를 하는 게 중요해요. 스펙을 쌓기 위해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 해외봉사 가는 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하생략)
배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