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비타트현장
국내외 해비타트에서 보내온 현장이야기를 소개합니다.재난재해를 함께 이겨내는 ‘나눔’의 힘
- 작성일2018/04/0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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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안전지대인가
예측할 수 없어 더욱 무서운 재난재해. 어떤 이들은 재난재해로 인해 하루아침에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산악지형이 국토의 70%를 차지하며 태평양 동북단에 위치한 탓에 해마다 태풍이 몇 차례씩 관통하며 홍수,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난다.
얼마 전에는 지진 안전지대였던 경주와 포항 등지에서도 여러 차례 지진이 일어났다. 이후 주거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고 재난재해 대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또한 커지고 있다.
재난관리 시스템과 안전문화의식 미흡
재해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의 안전관리수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한다. 국민의 자율적인 참여가 수반된 방재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불의의 재난에 맞닥뜨려질 수밖에 없다는 개연성을 어느덧 당연시하며 받아들이는 사회인 것 같다.
안전관리에 대한 정책이 미흡함에도 자율적인 참여를 통해 나눔을 확산하려는 비영리단체가 바로 ‘한국해비타트’이다. 한국해비타트는 ‘모든 사람에게 안락한 집이 있는 세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구호 활동을 비롯한 안락한 주거 마련을 위해 힘쓰고 있다.
물질적 지원과 후원뿐 아니라, 지속적인 안전관리와 입주자를 대상으로 한 심적 위로 등 사후관리에도 애쓴다. 이처럼 해비타트 운동을 통해 재난관리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안 희망의 마을 산사태
태풍과 국지성 집중호우로 인한 자연재해의 피해 규모는 엄청나다. 작년 7월 16일, 천안 주민들은 시간당 최고 90mm의 물 폭탄을 맞았다. 그리고 폭우로 인한 산사태는 그곳의 주민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해비타트와 이웃 주민들의 힘을 합치지 못했더라면, 그 아픔과 상흔은 쉽사리 치유되기 어려웠다.
수해복구 과정에서 가장 빛난 것은 ‘나눔’이었다. 해비타트와 여러 지자체에서 보낸 손길과 후원을 통해 빠르게 복구될 수 있었고, 곤경에 처한 이를 지나치지 않고 도와준 선한 이웃들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재난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년 수해복구를 총괄했던 충남·세종지회 관계자와 목조건축학교 자원봉사자들은 어떻게 재난을 극복했을까? 당시 상황을 충남세종지회 직원과 해목교 졸업생을 통해 자세히 들었다.
# 충남·세종지회 김종필 사무국장님 인터뷰
봉사현장에 참여하셨지요, 당시 현장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대책이 막막했었습니다.(웃음) 하지만 한두 명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내 지자체와 군부대·경찰 등 여러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모여들었습니다. 특히 주민들이 제일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습니다.
복구공사를 진행할 때 엄청난 노력이 들었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크게 두 가지에 집중했습니다. 첫째 토사 제거 문제였는데 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베란다 같은 곳은, 여러 기관·단체·시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릴레이로 퍼냈습니다. 나머지는 큰 도로 같은 곳에서 트럭 등 장비를 세워두고 작업했습니다.
두 번째는 복구 작업이었습니다. 해비타트 스태프들과 목조건축학교 졸업생들, 그리고 학생들, 외국인 자원봉사자와 관공서까지 힘을 합쳐 복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봉사활동의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위급할 때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특히 재난재해 때 도움을 주고받은 감동은 남달랐습니다. 충남·세종지회의 경우, 매년 화재로 피해를 입은 가정 1~2가구를 돕고 있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나눔의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 해목교 44기 졸업생 최인회님 인터뷰
‘해목교’라고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인데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해목교’라는 건 ‘해비타트 목조주택 학교’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해비타트의 집짓기 크루 리더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2002년 김용철 교수님이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5기 이후부터는 전문 리더 양성으로 목적이 바뀌었고, 지금은 전문적으로 집을 짓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현재 47기가 교육받고 있고요, 저는 44기 졸업생입니다.
천안 희망의 마을 수해피해 복구과정에서 해목교가 참여한 계기와 맡은 역할은요?
김종필 사무국장님이 해목교 졸업생 밴드에 사진을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사진을 보고 곧바로 달려왔습니다. 해목교에서 배웠던 기술로 피해를 본 집을 뜯어내고 다시 새집을 지었습니다.
큰 규모의 피해였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 많았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굉장히 고마운 일이 많았죠. 복구 작업을 할 때 비가 많이 쏟아졌어요. 희망의 마을 옆에 큰 도랑이 있는데 그게 토사로 막혔거든요. 비가 쏟아지면서 토사가 계속 집으로 흘러들었는데, 외국인 근로자 40명이 토사를 전부 마대에 쓸어 담아 퍼내 줬거든요. 그분들 덕분에 그 뒤로 비가 내려도 걱정을 안 했어요.
글 해비타트 기자단 2기 1조
사진 홍보팀 김은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