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비타트현장
국내외 해비타트에서 보내온 현장이야기를 소개합니다.[봉사파트너] 봉사활동소감문-(주)세영 유병해 팀원
- 작성일2014/05/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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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감문] 드디어 만나러 갑니다…
글 : ㈜세영 유병해 팀원
지난 4월 23일, ㈜세영의 임직원 및 가족과 함께 ‘Global 봉사활동 1기’ 활동을 떠났습니다. 설레는 마음과 기대감 그리고 밀알의 사명감을 갖고 일주일간의 여정이 계획된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장시간 비행과 이동 끝에 우리는 홈파트너가 있는 봥크라쁘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현지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35~38도를 웃도는 날씨가 우리를 반겼습니다. 체감 온도가 무려 40도가 넘는 무척 더운 날씨라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흐를 지경이었습니다.
우리가 봉사활동 할 집은 총 2세대였습니다. 1번 집은 ‘옌욘(39세)’ 이라는 이름의 젊은 할머니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옌욘은 청소부일을 하며 사위와 딸 그리고 3개월 된 예쁜 손녀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2번 집은 ‘이앙트레(40세)’의 집이었습니다. 이앙트레는 모터택시(오토바이택시)를 운전하며 예쁜 아내와 3명의 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홈파트너의 환대 속에 우리는 봉사 활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2개의 조로 나뉘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조는 1번 집, 2조는 2번 집을 맡았습니다. 현지 작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처음 해보는 일에 잠시 우왕좌왕했지만 이내 활동에 적응하며 각자 주어진 작업을 잘 수행해 나갔습니다.
집 구조는 아주 단순했고 조적공사는 단열재 없이 단순히 외줄 쌓기(한 줄로만 쌓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대한민국의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습니다. 하지만 이 곳 캄보디아에서는 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집마저도 비싼 임대료를 주어야만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작업과 적응하기 힘든 날씨 탓에 금새 지치고 힘이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엔 인상이 한 가득 찌푸려 졌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현지 아이들이 우리를 위한 깜짝 공연을 해주었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낯선 환경을 뒤로한 채 찌푸려진 얼굴이 모두 환한 웃음으로 뒤바뀌었습니다. 아이들의 밝은 모습이 그깟 더위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3일간의 봉사를 마친 마지막 날, 주택 헌정식이 진행 되었습니다. 새로운 집의 주인이 된 이앙트레 가족들과 ㈜세영 봉사단은 함께 모여 나무를 심고 리본 컷팅식을 했습니다. 또한 모형 열쇠를 전달하는 식순을 통해 진정한 집의 주인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옌욘 가족은 미처 완공되지 못한 집에서 헌정식을 진행했습니다. 바닥 성토가 마무리 되었고 벽 조적공사가 70% 가량 진행된 상태로 일정이 마무리되어 준공을 보지 못해 무척 아쉬웠습니다.
봉사란?
사전적 의미로는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애쓰다’라는 뜻입니다. 봉사 활동 하는 기간 내내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의 이태석 신부님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 분께서는 진짜 봉사를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를 마친 뒤 카톨릭대를 졸업하여 성직자가 된 그는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 꿈과 희망을 심어준 분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신 자신을 돌볼 겨를은 없었는지 그만 암으로 투병하던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나에게도 의사라는 재능과 삶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분명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봉사활동을 하고 나서 나의 생각이 무척 어리석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는 금전적 여유는 없으나 강한 체력과 건축라는 작은 재능도 있었지만 그런 재능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도움에 대한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 봉사의 참 뜻을 알게 해준 ㈜세영 가족과 해비타트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시나요? 해비타트에서는 해외 건축봉사뿐 아니라 국내 건축봉사와 기부, 후원도 할 수 있습니다. 해외 건축봉사의 참 맛을 느낀 저는 이 참에 커피 한잔 안 마신다 생각 하고 한 달에 1만원씩 부담 없는 후원을 하기로 약정했습니다.
누군가는 캄보디아가 못사는 이유가 국민성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작물을 심을 땅과 지하 자원이 많은데도 게으름 탓에 이를 활용하지 못한다고들 했습니다. 물론 더운 날씨와 부족한 문화 탓에 게으른 면이 없진 않은 것을 인정 합니다. 허나 저는 그것을 단순히 국민성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캄보디아는 1975~1979년 4년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즈 지도자 폴 포트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 한다는 명분아래 200만 명을 학살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다. 일면 ‘킬링필드’라 불리는 그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노동력이 없다는 죽임을 면치 못했고 교사, 의사, 대학 나온 사람, 안경을 쓴 사람 등 학식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찾아 죽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해방 후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꿈을 꿀 수 있도록 가르쳐줄 스승도 그들에겐 없었습니다. 지식, 기술, 학습.. 모든 것들이 멈춰 버린 세상 속에 방치되었을 뿐입니다.
저는 우리가 직장 내에서 일하는 시간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시간일 뿐이고, 밖에 나와 사람들과 즐길 수 있는 시간만이 인간의 ‘생활’을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현대인의 삶은 ‘생존과 생활이 공존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든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과연 ‘생활’이란 것이 존재할까요? 제 눈에 비친 모습들은 그저 ‘생존’을 위한 시간 밖엔 없는 듯 보였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 나라도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릇된 사상을 가진 자들로 인해 고통 받았을 캄보디아 국민들의 아픔을 생각하니 가슴 속 생채기가 생긴 듯 무척 아려옵니다.
허나 좌절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희망찬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봉사활동에 참가한 현지 가이드를 통해 캄보디아는 세계 문화 유산인 앙코르와트와 자신들만의 언어가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들은 절대 무지하지 않는 민족인 것입니다. 또 우리의 홈파트너 이안트레씨와 같이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국민들입니다. 그들이 무한한 발전이 기대되는 항목이지요.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속담 중에 “뚝 떠으 껌뽕 너의(배는 떠났지만 항구는 남아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의 행적은 항구처럼 남아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떠나지만 우리의 손길이 닿은 집에서 홈파트너와 가족들은 ㈜세영 봉사단을 기억 해줄 것을 확신합니다. 물론 우리도 그들을 잊지 않고 살아갈 테지요.
캄보디아를 뒤로한 채 비행기에 몸을 실은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몸은 이별이지만, 마음은 이별이 아닌 작별이다’라고 말입니다. 지난 7일간을 함게해 준 옌욘 가족과, 이앙트레 가족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짧은 시간이 꿈꾸듯 행복했습니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