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해비타트와 함께한 이들의 후기 인터뷰, 지금 만나보세요.[칼럼] 건물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는 도시
- 작성일2016/04/1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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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ing Together_집 이야기
건물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는 도시
_글 서윤영(건축칼럼니스트)
주택의 방마다 적절한 가구가 갖추어져야 가정이 안락해지는 것처럼, 거리도 가로등, 가로수, 화단, 벤치, 음수대, 화장실, 작은 쉼터나 공원 등의 시설들을 적절히 갖추어야 안락한 도시가 된다.
건물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제일 중요한 게 빠졌잖아. 건물만 잔뜩 들어차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잖아.” 20년 전, 건축학과에 갓 입학해서 의욕이 충만하던 때였다. 과제물이 산더미처럼 밀려와도 힘든 줄 모르던 시절, 밤을 새워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학교에 가져갔을 것이다. 그때 그것이 날아가는 새의 날개를 본떠 그린 미래 도시의 어느 공항 대합실이었는지, 비온 뒤 힘차게 뻗어 나가는 죽순을 닮은 미래의 어느 고층빌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교수님의 저 한 마디 일갈만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크고 화려한 건물들만 잔뜩 그려간 나에게 교수님은 정작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다고, 건물 옆에 사람을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건물의 크기가 가늠되는 거라고 하셨다.
학교에 다닐 때는 그리던 도면의 축적이 1/100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도 1.7cm로 쉽게 그려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건물의 크기도 규모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축적이 커질수록 사람의 크기는 반대로 점점 개미만 하게 작아졌다. 너무 작아 그리기도 힘들 뿐 더러 그려봤자 보이지도 않는 사람…, 어느 사이엔가 사람은 생략하고 그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갔다.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스트리트 퍼니처
“아름다운 도시란 어떤 도시인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도시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그 도시의 표정이 밝아야 하고, 도시의 표정이 밝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행동이 밝고 활기차야 한다. 1980년대 학생 시위가 한창 많을 때 서울의 광화문 앞 광장에는 전경과 사복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곳은 보행자 광장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잠시 산책을 나온 근처의 직장인, 아이를 동반한 주부, 데이트하는 연인은 물론 때로는 아마추어 가수의 노래마당까지 펼쳐지기도 한다. 그 당시와 비교해 그곳에 새롭게 들어선 화려한 건물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8차선 도로를 없애고 시민광장을 조성하니 사람들의 행위가 바뀌어 아름다운 거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민광장이 곧 도시기반시설에 해당하는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라고 할 수 있다.
넓고 곧은 길이 있다 하더라도 아스팔트 도로 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곳은 자동차만 지나다니는 황량한 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변에 화단과 벤치, 분수대가 있다면 누군가는 그곳에 잠시라도 머무를 것이며, 그렇게 머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거리는 밝은 얼굴들이 넘쳐 아름답게 될 것이다.
건물과 거리, 사람을 잇다
스트리트 퍼니처는 거리의 건물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안정적이다. 건물과 거리가 급격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질 때 아름다운 건물이 된다. 요즘 생긴 카페에 가보면 거리를 향해 작은 테이블 몇 개를 내놓은 곳이 많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거리를 걷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서로 교류하게 된다. 그것이 가능하기에 거리를 걷다가도 문득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 가장 섬세한 요소 중 하나는 툇마루인데, 그 이유는 이곳 역시 실내공간과 야외공간을 유기적으로 잇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전통건축에는 수돗가, 장독대, 작은 꽃밭 등이 오밀조밀하게 마련된 안마당이 있어 그곳이 생활의 중심공간이 된다. 안마당 주변으로는 툇마루가 둘러져 비가 오는 날에도 그곳에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기가 좋았다. 마당에서 세수하고 꽃밭을 돌보며 바람을 쐬는 ‘사람의 행위’, 수돗가, 장독대, 툇마루 등의 ‘스트리트 퍼니처’가 ‘건물〔툇마루와 댓돌〕’과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된 형태였다.
제일선은 사람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이를 현대 도시의 대형 건물에 확대해 보아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어야 할 것, 즉 제일선(第一線)에 서야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닌 사람들의 행위다. 제이선(第二線)에는 사람들의 행위가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도심기반시설, 즉 스트리트 퍼니처가 있어야 하며, 건물은 마지막 제삼선(第三線)으로 물러나 자리해야 할 것이다. 제삼선에 있어야 할 건물이 제일선으로 나올 때, 사람은 설 자리를 잃는다. 20여 년 전 내가 처음 건축을 공부할 때 저지른 실수는 바로 그것이었다.